Historical Games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전진철퇴 2012/03/15 09:15 by Mado

<금방이라도 칼을 휘두를 것 같은 왼편 두번째 사무라이 모델이 시마즈 요시히로 軍 입니다.>

 오랫만에 매장의 장식장 사진을 찍고 정리하다보니 예전에 작업해서 넣어두었던 임진왜란 관련 모델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대량으로 페인팅을 해야하는 아시가루 모델들은 사시모노가 아무래도 그리기 편리하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였던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휘하의 병사들로 작업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만, 4 모델만 제작해서 넣어놓을 예정이었던 사무라이 모델들은 그나마 프리핸드 페인팅이 쉬우면서도 각각 특색있는 디자인을 선택해서 작업한 기억이 있습니다.

<구로다 나가마사 軍 의 각종 기치들. 사시모노로 따지자면 이보다 쉬울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현대의 규슈 남서부 가고시마 일대의 사츠마국을 지배하던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입니다. 제일 위의 모델들 사진에서 보자면 오른쪽 어깨 위로 카타나를 치켜든채 휘두를 자세를 취하고 있는 왼편에서부터 두 번째의 모델입니다. 등뒤의 사시모노가 검은색 바탕에 십자 문양이라서 쉽게 구별이 갑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에 침입하여 원균 함대를 격파하고 이후 사천성 내에서 농성하던 중 성을 공격하던 명나라군 20 만 (조선측 기록으로는 약 3 만 9 천)에 맞서 7 천 병력으로 명군을 패퇴시키고 전사자 3 만 7 천을 내게 했다고 합니다. (출처 島津家文書) 전쟁 말기에도 순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500 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진격하던 중 야간에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를 만나 노량 해전에서 휘하 병력의 90% 를 잃고 패주합니다. 본국에 전과를 보고할 때에 적군의 수급 대신 코를 베어 보낸것도 시마즈가 유명하며, 다만 가문 특유의 불교 신앙으로 인해 전사자는 피아를 막론하고 모두 부처라고 믿어 일본에 돌아가자 와카야마산 근방에 고려진적미방전사자공양비(高麗陣敵味方戦死者供養碑)를 세워 양군 전사자의 혼령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장 유명해진건 역시 막부 성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측 장수로 참가하여 패색이 짙던 전투 후반 휘하 1500 의 병력으로 전방의 동군 본진을 관통하여 후퇴한 전진철퇴때문입니다. 원래 시마즈는 이에야스의 명을 받고 동군에 가담하여 후시미성을 토리이 모토다다(鳥居元忠)와 함께 수비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문서로 명령을 받은게 아니라서 토리이가 입성을 거부하고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서군 한 가운데 남겨져 어쩔 수 없이 서군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병력도 많지 않은터라 세키가하라 전투 내내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서군이 붕괴하는 시점에선 이미 후방을 변절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와 함께 동군의 주력이 밀고 들어오게 되어 후방으로의 철수도 불가능해집니다. 이때 기발한건지 용맹한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전방의 이에야스 본진 2 만명을 뚫고 전진하여 적의 후방을 돌아 후퇴합니다. 나름 타당해 보이기도 하는게 이에야스의 본진은 실질적으로는 전투부대라기 보단 그야말로 총지휘부와 지원병대였고 이를 직위하던 것이 혼다 타다카츠의 500, 이이 나오마사와 마츠다이라 타타요시의 병력을 합해도 실제 전투 병력은 5 천 남짓이었기 때문에 전방에 적이 더 적었던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 물론 혼다와 이이가 보통 인물이 아니란 건 좀 무섭습니다;;;



 위의 영상과는 달리 전진철퇴 직전에 휘하 모든 병력은 사시모노와 노보리를 꺾어버리고 그야말로 결사적으로 돌격했다고 합니다. 이때 무리하게 시마즈를 추격하던 이이 나오마사는 철포에 저격당해 결국 전투 이후 요양 중 사망하게 되고, 요시히로의 동생이자 영무자로 활동하던 도요히사를 전사시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역시 부상 당합니다.  어쨋거나 철포대와 기병을 적절히 조합하여 결국 대부분의 병사를 잃지만 요시히로는 무사히 사츠마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 이때의 용명을 인정받은 것인지 이후 토벌전을 2 년 넘게 무사히 버틴 덕분인지 모르지만 시마즈 가문은 영지를 보장받게 되고 이후 계속 사츠마 일대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로부터 약 200 년 후에는 시마즈번의 11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가 키워낸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 사츠마번의 인물들이 막부를 뒤집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복수의 한 방을 제대로 날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포스팅의 진짜 주제:

임진왜란은 물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그대로 써먹을 수 있도록 시마즈 요시히로 軍 으로 페인팅을 한 번 해볼까 고민 중입니다;;;
 
 



덧글

  • B군 2012/03/15 11:10 # 답글

    우와 이거 저도 찬성요 ㅋ 기왕 시마즈군으로 할거면 총든 놈 하나는 스테가마리(ステガマリ)로 칠하심이 어떠실런지요 ㅎ

    * 결사의 무사가 총을 한 손에 쥐곤 아군의 철퇴로 옆에 매복해 오직 추격해오는 오는 적의 지휘관 하나만 노리고 저격하는 전법(...) 나오마사를 마상에서 저격한 것이 이거.........라는 이야기도 있지효 ㅎ
  • Mado 2012/03/15 11:59 #

    위에 동영상 보시면 스테가마리가 나옵니다~ ㅎㅎ

    이이 나오마사는 추격전 중에 좌선진(座禪陣) 사격에 맞아 낙마하고 스테가마리가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를 저격하지요. 다만 텟포 사무라이가 아니라 아시가루 복장으로 등장해서 재미있습니다 ㅋ
  • Nine One 2012/03/15 18:09 # 답글

    조선,명나라 연합함대가 당시에 이순신, 진린이었죠. 그런 면에서 보면 저 집안은 운이 상당히 좋은 집안입니다.
  • Mado 2012/03/15 22:28 #

    육전의 맹장 명성을 깎아먹게 되었으니 운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목숨은 건져서 돌아갔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요.
  • 스노틀링 2012/03/20 10:06 # 삭제 답글

    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저런일이 있었군요 이런 배경때문에 후에 보신전쟁에서도 사츠마 번이 막부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항한것이겟죠?
  • Mado 2012/03/22 11:10 #

    물론 무진전쟁까지 계속 복수의 기회를 노린 것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겠습니다만 삿초토 연합이라 불리는 사츠마 초슈 토사 번 중에서도 사츠마가 막부 세력 토벌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토호쿠 지방이 소외되는 원인이 대정봉환 이후 막부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킨 이 지역에 대한 차별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탓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 현철검 2014/12/24 13:40 # 삭제

    시마즈는 정치센스가 없어서. 세키가하라에서 삽질한걸로 보여집니다.

    후에 일어나는 메이지유신은.. 동군 서군에서 이시다 미쯔나리쪽에 섰다가.
    영지가 줄어든 곳들의 반기입니다. 5대로 중에 모리 쪽이 영지가 많이 쪼그라 들었고.
    쵸수 사츠마등도 차별을 받았다기보다는 영지가 쪼그라드는 것을 두고두고 한으로 생각했을수도 있지요
    ..
    동군 서군에 나뉘어서 진영짠쪽은 고만고만하기 존속이 되었습니다.(이런곳이 많습니다. 아버지와 차남은 동군. 장남은 서군 이런식으로 나뉜 다이묘들이 대다수입니다.)

    세키가하라의 이시다 미쯔나리쪽은 혈연관계가 없는 이합집산이라 결속력이 없었고.
    도쿠가와 쪽은 여기도 이합집산은 맞지만 . 일다 혈연관계가 많고. 도쿠가와 중심으로 2백만석이 넘었고미카와(도쿠가와) 군단을 중심으로 한 결속력이 강해서.. 배신떄리거나 5-6만은 절대 도망가지 않을 병력 구성이었고..
    이시다 미쯔나리쪽은 2-3만만이 절대 배신떄리거나 도망가지 않을 조합이라.. 나머지 20만에 가까운 다른 동맹 및 연대 관계의 다이묘들은 눈치보다가 어디로 붙을지 정하는 쪽이었는데..
    시마즈쪽은 정치센스가 없어서 정정당당하게 싸우는줄알고 진쳤다가 포위당해서 뚫고 나간건데.
    후에 일을 생각하여 길을 열어줬다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군세가 무너지던가 전사자가 전투병력의 10분1이 넘으면 졌다고 판단하여. 휘하로 넣던가. 항복하던가 졌다고 누가 셋뿌쿠(할복) 하여 인정하는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시세가 저렇게 돌아가니 30만에 가까운 병력이 모여서 한나절 싸움하고 모든게 끝난것입니다.
    이시다가 농성전을 했어도 3년은 끌었을텐데... 이시다와 도요토미파벌간에도 균열이 많아서.
    이미 도쿠가와 쪽이 이기는 싸움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자세한 사항은 시바료타로의 소설들이 가장 세세하고 역사적 고증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 제루기 2012/08/26 10:00 # 삭제 답글

    정유재란때 투입된 명군이 총합해서 10만 정도였고 그중에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를 공략한 동일원이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지요. 조선과 명은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를 잡는걸 우선순위로 뒀기에 용장급 무장인 유정, 마귀가 모두 그쪽으로 향했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별볼일 없던 무장인 동일원이 담당했지요. 동일원은 초반엔 잘 활약하다 화약 관리 실수로 본진에 폭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당했고 이때 수천 명의 명군이 전사하지요. 그러니 사천 전투때 시마즈 요시히로가 20만의 명군과 싸웠다는건 딱봐도 말도 안되는 뻥튀기에 불과하지요. 종전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처형되고 가토 기요마사도 사망후에 가문이 몰락하는 반면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문이 계속 존속하여 메이지 유신때까지 떵떵거리며 살다보니 시마즈 요시히로에 대한 과장이 많지요.
  • Mado 2012/08/27 01:03 #

    살아남은 것이 결국 최고의 영광이 된 셈이네요. 뒷이야기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도 오사카에서도 결국 살아남은 쪽이 더 미화가 많이 되었네요.
  • 현철검 2014/12/24 13:29 # 삭제

    도색이 정말 훌륭하군요,,

    시마즈가 살아남서 부풀려진것도 있을수 있습니다만. 시마즈는 원래가 가문이고.
    가토 키요마사는 원래 영주가 아니고 시즈가타케 의 일곱자루창이라 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의 무사입니다.
    도요토미가 키운 무장들과 오부교들중에 그닥 존속했다거나. 세키가하라 이후 막부 세계에서 대접받은 사람은 거의 전무합니다.(전원 자기 세력이 미미했던 관계로.)
    후쿠시마 역이 이용당했다고 봐야 되며.

    이게 도요토미 자체가 출신이 미천하고 형제가 없어서(동생 사망). 오다노부나가처럼 재능을 위주로 인재를 기용해서 일어난 망극입니다. 고니시도 그렇고.
    세기가하라의 이시다 미쯔나리등은 전부다가 가문이나 다이묘 출신이 아닌. 재능이 출증한 자들인데..

    시마즈는 가문이므로 아무리 쇼군이라도 봉건제에서는 함부로 할수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도요토미의 통일자체가 불완전한 통일이라 5대로에 속하는 거대 다이묘들은
    그래 니가 여기서 제일 짱이다.! 형님으로는 모시지만. 우리 땅을 건드리면 않된다. 식의 통일이라..
    5대로에 속하는 주축가문들은 임진왜란에 별로 출격도 안했고..

    도요토미파에 속하는 자들만 임진왜란에 적극적이어서. 고니시와 가토는 원래가 전국시대에서도 그리 큰 땅을 가지고 있다던지 세력이 거대한 다이묘들이 아니기에 후세의 평가도 별로 없는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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